운명마저 거슬러 보자 | 임동진의 예술읽기
  • 작성일 2012-06-20
  • 작성자 Chungkang

샬롯의 아가씨 (The Lady of Shalott)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1888

 

 

 

벌써 10여 년도 넘은 영화다.

남자가 보아도 질투 나는 남자, 리처드 기어가 한참 잘 나갈 때 이 바람둥이 같은 사내가 기사가 되어 나타났다.

넌 정말 좋겠다. 머리도 작고, 뭘 시켜도 폼 나니.

<프리티 우먼>에서 겪었던 시샘과 좌절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그래 비교하지 말자. 종자가 다른데.

쟤는 영화 속에 살고 나는 현실이잖아. 기어차 보다 오토가 좋다. 내 차는 오토다. 별 유치찬란한 치기에 스스로도 황망해 하며 그래도 머리라도 좀 작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가슴 쥐어뜯는 건 오로지 대두인(大頭人)들만의 숙명이리라.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한 겨~. 하기야 어제 오늘 안 사실도 아닌데. 그래도 넌 숀 코넬리 따라 가려면 아직 멀었다. 나도 저 나이되면 저 이처럼 되고 말거야 미친 희망을 품고 애써 맘 달래며 보았던 영화, <카멜롯의 전설>.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 랜슬롯, 그리고 아더 왕의 왕비가 되려다 엉뚱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기네비에가 펼치는 러브 로망 활극이다. 배경은 모른다. 중요하지도 않고. 어차피 전설이니까.

 

문제는 바로 이 남자, 랜슬롯이다.

그에겐 기네비어 말고도 오매불망 그를 그리는 또 한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랜슬롯은 전혀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누가 날 사무치게 좋아하는데 난 그를 모른다. 아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그녀의 이름은 일레인.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의 슬픔으로 일레인은 죽음에 이르고 백합과 금빛비단에 덮인 그녀의 시신은 작은 배에 실려 그녀의 사랑이 있는 카멜롯의 랜슬롯에게 흘러간다. 이 슬픈 사랑의 전설은 19세기, 팽창과 엄숙한 도덕의 시대였던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 시인 테니슨에 의해 ‘샬롯의 아가씨 The Lady of Shalott’ 라는 시로 다시 태어난다. 성 안에 갇힌 샬롯의 아가씨는 창밖을 내다보면 저주를 받으리라는 예언으로 마법거울을 통해서만 바깥세상을 바라본다. 화려한 직물을 짜며 소일하던 그녀는 자신의 단조로운 삶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때마침 섬광처럼 수정거울을 스쳐가는 기사 랜슬롯을 보게 된다. 사랑에 눈 먼 샬롯의 아가씨는 예언의 금기를 깨고 성에서 빠져 나와 랜슬롯을 찾아 작은 배에 몸을 싣는다. 금기가 역설적으로 깨지라고 있는 반면 저주는 저주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저주로 죽어버린 그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주검을 실은 배는 그녀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캐멀롯의 랜슬롯에게 닿고 알 수없는 교감을 느낀 랜슬롯은 그녀를 애도하며 슬퍼한다.

 

슬픈가? 그래 슬픈 이야기다.그런데 이 슬픈 이야기를 더 처연하게 만드는 정말 슬픈 그림이 하나 있다.

19세기 영국 라파엘전(前)파의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의 대표작 <샬롯의 아가씨 The Lady of Shalott>가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를 되새기며 그림을 잠시만 응시해 보라. 아름다운 흰 색 드레스를 입고 숙명 같은 사랑을 찾아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떠나는 여인. 저 건너에 가면 내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이 줄을 놓으면 예언처럼 내 몸은 죽을지 모르나 내 사랑이 나를 구해줄 거야. 예언은 두렵지 않아. 그를 볼 수만 있다면. 해는 서산으로 넘어 가고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작은 배에 의지한 채 오직 한 가지 염원의 실현을 위해 비통함 속에도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여인. 사랑을 위해, 영혼의 해방을 위해 아득한 저 강 건너 어디에선가 나를 반길 것 같은 사랑을 향해 긴 목 곧추 세우며 마지막 생명줄을 놓으려는 여인. 그녀의 몸만큼 이나 섬세한 가녀림 속에 감추어진 이루어질 수 없는 생에 대한 갈증과 정열. 사랑과 자유와 해방을 위해 죽음마저 깨고 나오려는 여인의 얼굴엔 차라리 한줄기 성스러운 빛. 그리고 바람과 물결, 꽃잎, 자연의 숨결들.

 

르네상스 말기의 형식적이며 틀에 박힌 회화 전통에 반하여 중세 이탈리아의 화가 라파엘로 이전의 소박하고 참신한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한 라파엘전파. 19세기 당시의 사회조류를 반영하듯 과학적인 정확함과 현미경적 세밀함을 추구하는 화풍으로 오늘날 가장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은 이 유파의 대표화가인 워터하우스는 그 이름만큼이나 청량한 필치로 이 애잔한 사랑의 전설을 더욱 아름다운 슬픔으로 승화시키며 감상자에겐 가슴 속 시린 첫 사랑의 추억을 한 켜 꺼내어 그리워하게 한다.

 

사랑을 찾아 떠나는 그녀의 뱃길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렇게 하면 예언대로 죽게 됨을 알면서도 운명이 엮어 놓은 길을 따라가는 그녀의 선택은 과연 합당한 선택이었을까. 성 안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좀 지루하긴 했어도 무난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다들 그렇게 못 살아서 안달들인데. 그러나 성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 속엔 그녀는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그녀의 삶은 삶으로 얻어지는 삶이 될 수 없다. 거기엔 삶이 주는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애환이 없다. 그래서 자기가 없다. 늘 배부르고 편하게 화려한 직물을 두르고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소통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려면 벽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대는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가. 무식한 질문이라 탓하지 말라. 이에 선뜻 대답이 망설여짐은 누구나 가슴 속 한 편엔 펴보지 못한, 이루지 못한 생의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음이기 때문이다. 억울하지 않은 가? 현실에 담보된 내 인생의 모습을 언제까지 인정하며 살 것인가? 다들 그렇게 사는데 라며 덮어 두기엔 우리 인생이 그리 길지 않음을 살면서 느끼리라. 그래서 젊음이 있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어쩌면 운명마저도 거스를 수 있다는 용기를 갖고 성에서 나오라. 너무 막막하고 암담하다 말하지 말자. 한 때의 칭기즈칸은 가난 탓 하는 대신 쥐를 잡아먹고 살았고, 자기 이름 못 썼어도 타인에게 귀 기울이고 지혜를 구했으며, 목에 칼 형틀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났다 안하던가. 포기함을 인정하는 순간, 그때가 그대의 삶이 멈추는 지점임을 잊지 말자.

 

샬롯의 아가씨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당장 가서 와락 끌어안고 싶게 만든다. 그녀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가? 가녀린 그녀의 미모 때문인가. 아니다. 운명 저 편에 있을 또 다른 세상을 향하여 금기의 성을 박차고 나와 그 연약한 손에 들려있는 묶인 끈을 놓는 용기 때문이다. 가자. 일어나 가보자. 이 긴 겨울, 칼바람처럼 매서운 기운으로 그대를 묶고 있는 나태와 안주(安住)의 끈을 잘라내어 절대자가 이미 계획해 놓았다는 그대의 운명을 과감히 거슬러보자. 비록 그 끝은 변치 않을 것이나 가는 길은 분명 달라질 것임을 나는 안다.

 

 

글_임동진_청강문화산업대학교 에코디자인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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